공의 이름은 영원(榮源)이요 자(字)는 여행(汝行)이며 호(號)는 삼산(二山)이시니 일찍 경릉참봉(敬陵恭秦)을 지내셨는데 효행이 특이 하시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자헌대부 형조판서(資憲大夫刑曹判書)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증직이 있었으니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시다。 그의 선대는 교동사람(본관)이니 익대공신 형조판서 함산군(翊戴功臣刑曹判書咸山君)이신 휘 원보(元寶)에서 공의 十六世祖가 되시고 고조의 이름은 신일(信一)이요 증조의 이름은 창문(昌文)이요 조부의 이름은 도홍(道弘)이시니 모두 숨은 덕으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아버지의 이름은 형상(銜相)이시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큰어머니는 증정부인 연일정씨(贈貞夫人延日鄭氏)이니 자손이 없었고 또 한 분의 친어머니는 증정부인 예천임씨(贈負夫人體泉林氏)시니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영기(榮基)요、작은 아들은 곧 공(公)이시다。 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으셨고 효도와 우애가 하늘이 내리신 것이었다。나이 겨우 十二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三년을 피눈물로 지내시매 일찍이 이(齒) 틀을 들어내 보이지 않으셔서 온 마을이 효동(孝子童)이라고 칭송하였었다。어머님믈 섬기매 그 뜻울 잘 이으셨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지매 낮에는 나무를 해다가 나무로 쌀과 고기를 사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서 이를 지고 해변에 가서 전어(箭魚) 잡는 어부에게 주고 생선고기와 바꿔다가 어머니의 입맛을 돋구어 드렸다。 공께서는 어릴 때(十二세) 아버님을 여위었고 집안이 또한 넉넉지 못하여 나이가 장성하여도 결혼을 하지 못하매 어머님의 뜻에 따라 배씨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빙모를 삼기매 어머니와 같이하니 빙모 또한 사위 아기를 아들과 같이 하였다。 처가에 있은 지 三년만에 예를 갖추어 혼인을 이루고 널리 동서(同婿)가 될 사람을 구하여 정덕수(鄭德秀)로써 배씨집 작은 사위를 삼아서 빙모를 의탁케 하고 공은 부인과 함께 본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외가 모두 정성으로 효도하여 어머니를 잘 모시었다。 공이 집에 돌아온 이듬해에 큰 형이 따로 분가해 주려하매 공은 만류치 못하고 재산을 나누게 되었는데 공께서는 토지에 있어서도 나쁜 것만 갖고 그릇들도 또한 오래된 것만 가졌다。 이에 부지런 하고 검소하게 살림하여 형편이 좀 나아지게 되었는데 살림을 나온 해는 정사년 이었다。 그 해 겨울에 어머니가 우연히 병환이 나서 점점 위독하였다。 여러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단(壇)을 두어 十일 밤을 기도 드려야만 병환이 나을 것이라고 하매 공이 부인 배씨와 함께 단을 집 뒤의 안산(案山) 정결한 곳에 만들고는 깊은 겨울 눈바람을 맞으면서 지성으로 천지신명에게 빌은 지가 十일이 되었는데 그날밤 어머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문병하고 가더니 병환이 곧 낳았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지신명이 그 정성스런 효도에 강복하여 특히 그 삶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로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전과 같이 그 단 앞에 가서 기도 드리매 쇠약했던 어머니가 수를 더하여 十七년을 무병 하시더니 계유년 五월에 이르러서는 어머니가 노환으로 五일간을 신음하시다가 효험을 보지 못하고 천수가 한(限)이 있어서 홀연히 세상을 버리매 공께서 땅을 치고 울어서 실신케 되매 이웃들이 일을 파하고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수의옷과 이불 널을 잘 장만하여 염하고 장례 모심을 모두 예를 쫓아 조금도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묘소에 조석으로 곡하매 아무리 사나운 바람과 폭우가 오더라도 조금도 피하지 않으매 三년상 동안에 농사를 잘 짓지 못하여 조석상식을 드릴 수가 없었으나 초하루 보름과 소상 대상을 잘 모시었다。 매달 삭망에는 수질(首絰‥상주가 머리에 쓰는 것)과 띠(絰帶‥상복의 허리띠)를 벗지 않고 종일토록 여막(廬幕) 밖에 나가지 않으매 원근의 친구로 조문 올 사람들은 반드시 삭망날을 기다려서 인사를 닦았다。 공께서 三년상을 지내는 동안에 나아가 四十이 되어서 탈상 이후에도 상복이 모두 헤어졌으나 때때로 애통하기를 초상난 첫날과 같이 하였다。 형의 살림이 부족케 되매 자기가 받은 것을 되돌려 주고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는데 신사년 七월에 이르러 그 형이 세상을 버리게 되니 공께서 동기간을 잃은(割半之通) 아픔을 견디지 못하였고 초종범백(初終凡百)과 장례절차를 모두 스스로 부담하였으니 세 번 제사 때의 제물들이 또한 공이 마련한 것이었다。 공께서 四十세 이후에 처가로부터 자기 집으로 이사 은 뒤에도 힘써 처족의 아들 이언(以彦)을 구해 빙모의 양자릍 삼아서 배씨 집 제사를 받들게 하고 빙모를 모셔다 함께 살매 오히려 옛날 데릴사위때 보다 낫게 하여 살아서나 작고한 후에도 시종 한결갈이 하였다。타성(他姓) 들의 고아에게도 자기 자식과 갈이 거두어 기르고 규수를 택하여 장가들이고 가산을 만들어 준 것이 또한 여럿이나 되었다。 부인 배씨는 나이 겨우 十三세에 공의 집으로 시집와서 능히 부인의 도리를 잘 지켰고 부군 모시기를 예에 따랐으며 시모를 효로써 받드셨다。여러 해를 가난하게 사실 때에도 두루 갖은 고생을 이겨내셨다。산에 읕라가 나물을 캐서 부엌반찬을 장만하였고 길삼과 바느질로 부지런히 일을 하셨다。자기는 옷믈 장만함이 없었으되 시모님의 것을 0모두 장만해 드렸고 혼정신성(昏定晨省 ‥ 어들 때 자리를 정하고 새벽에 문안하는 것)의 예와 동온하청 (冬溫夏清 ‥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시원케 해 드림)의 절차를 시종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평시에 시모께서 병환이 계시매 주야로 시탕(侍湯 ‥ 약을 달임)할새 옷은 언제나 띠를 풀지 않았고 정성껏 달여 드렸으며 언제나 좋은 반찬이다 색다른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품고 돝아와서 공양하였다。 동서간이나 친척간에 있어서도 화목으로써 주장하시더니 불행히도 계유년에 시모상를 만나서 슬퍼함이 예(禮)에 넘어서 거의 실신하더니 인히여 병이 되어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갑술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매 듣고 오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여 말하기를『배씨 부인이 시모님을 지하에서 모셔서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저 따라 가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부부(夫婦)의 아름다운 소문이 경향에 넘치게 되매 선비들의 여론이 크게 일어서 여러 고을이 움직여 조정에까지 올라가 글과 정문을 내려서 길이 오륜 오상(五常‥즉 仁義禮知信)을 후세에 심어 주어 세상의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夫婦)로 하여금 느낌이 있어서 분말케 하였도다。 공께서는 순조 三十四년 갑오 二월 二十七일에 나시어 고종 四十三년 병오 十월 八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七十三세였고 묘소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곤좌 건향(坤坐乾向)이시다。공의 아들 희배(熙培)가 八년을 산소 자리를 구하다가 다행히 명사(名師) 노병용(盧秉庸)을 만났는데 그가 기도하던 단(壇)의 터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이곳이 족히 깉이 모실만한 곳으로 다른 데를 구할 것이 없다』하므로 드디어 날을 가려 계축 二월 五일 이곳에 장사를 모시게 되었다。 무인 성주배씨는 무열공 휘 현경(武烈公 諱 玄慶)의 후손이요 은모(殷模)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九년 계묘 七월 一일에 나서 고종 十一년 갑술 十一 월 二十一일에 돌아가시니 나이가 겨우 三十二세요、올해 二월 二十일에 처음으로 낙상리 삼박골(二朴谷)건좌에 장사지냈다가 갑술 十一월 二十三일에 면례하여 합장하였고 계배(繼配) 울산박씨는 헌종 계묘 十一월 十九일에 나서 고종 임인 十월 十三일에 돌아가시니 나이가 六十세요 묘소는 홍주군 홍북면 내덕리 乙좌이다。 공께서 二남二녀틀 두었는데 큰아들 희배(熙培)는 순릉참봉으로 중추원 의관에 읕랐고、작은 아들 기배(基培)는 관리서 주사요、큰 딸은 진주류씨 희열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성주배씨 성선에게 시집갔다。희배(熙培)가 二남을 낳으니 큰아들은 종서(鍾曙)요 작은 아들은 종구(鍾九)이다。기배(基培)가 二남一녀를 낳으니 큰아들은 종석(鍾奭)이요, 다음은 종렬(鍾列)이요, 딸은 김제趙씨 인식에게 시집갔고 안팎의 여러 손자는 어리므로 모두 기록치 않는다。 슬프도다! 공의 천품이 영리하고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었으며 효도와 우애가 당년에 이름을 쳤었으나 가슴 속의 큰 뜻은 생전에 크게 쓰여지지 못했으니 공에게는 비록 유감이 없다 하겠으나 어찌 세상의 길에서 하나의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예나 이제나 천하(天下)에는 어두웠다가 현달케 되고 굽었다가 펴게 된 분은 오직 이윤(伊尹)과 부열(傅說)과 강태공(姜太公) 제갈공명(諸葛孔明) 같은 몇 따름이다. 공명이 몸소 남양에서 밭을 갈았고 강태공은 위수가에서 낚시질 하였으며 부열은 부암에서 축대일(板築)을 하였고 이윤은 신야에서 밭갈이 한 것이 그 때에 맞게 한 것으로서 이렇게 어두운 생활을 한 것을 아는 이가 드물었는데 성탕(成湯)에 이르러서야 고종이 찾고 문왕이 싣고(載) 소열(昭烈‥劉備)이 모셔다가 국가의 기둥과 조정의 중신(黼黻)을 삼았으니 어둡다가 나타나고 굽었다가 펴지게 됨이 때를 잘 만나고 못만남에 있을 따름이니 공께서 때를 만나지 못한 것도 진실로 인력으로 능히 미칠 일이 아닌 것이다。 공의 아들 희배(熙培)가 어머님의 기일(忌日 ‥ 제사날)에 환갑을 못오실 것을 추모하고 감탄하여 공의 행장록을 가지고 와서 한 말씀을 청하는 바 내가 글도 못하고 걈히여 노병이 있으나 진실로 감히 사양치 못할 의(義)가 있으매 간략히 대강을 기록하는 바 붓을 든 분들의 재량으로 오충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기 一九三六년 丙子 夏四月 乙卯日 全見备 謹撰